[Essay] 이지원,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이지원(그래픽 디자이너, 미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예술대학 조교수)


P는 꽤 유명한 사진작가다. 아직 젊은 편이라 '거장'의 반열에 끼워줄 수는
없지만 '최근 부상하고 있는 유명작가' 정도로표현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다.
P와 나는 같은 곳에서 근무하면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혹은 가끔 복도에서
우연히 얼굴을마주치며 간신히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의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동료로서 살갑게 대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막상가까워지기엔
만나는 빈도가 너무 적고 공통된 화제도 없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호두껍질 만지작거리듯이지내던 P와 내가 한 방에서 다소
무리한 미소를 지으며 시간을 보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떤 큰 미술관에서 P의
사진전을 열게되었는데 그곳에 비치될 카탈로그 디자인을 나에게 부탁한
것이다. 보수가 없는 일임에도 나는 작가 동료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흔쾌히
응했다. P는 카탈로그 제작에 최대한 돈을 아끼길 바랬다. 그래서 우리는
온라인으로 파일을 보내면 제본까지 해서 보내주는서비스를 통해 배송비까지
10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무려 하드커버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P는 만족했다.
(사진들을 인화하고 액자에넣는데 쓴 돈이 300만원은 족히 되리라)

디자인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P는 내 일하는 방식을 꽤 좋아했다. 파일을 넘기기
전 어느날 P는 얼마정도 보수를 주면 자신의웹사이트를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묻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얼굴을 마주하고 보수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스타일인 듯) 나는평소에 내 기준대로 금액을 알려주고 '너는 내 동료니까
30퍼센트 할인해 주겠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뒤로 P는 웹사이트에대해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 P는 깜짝 놀란 것이다. 웹사이트 '디자인'을
'구매'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들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P의
현재 웹사이트는 내 학생중에 한명이 아르바이트로 디자인해 준 것이다.
짐작컨데아르바이트비로 이삼십만원 정도 쥐어줬지 싶다. 그런데 내가 그
금액의 열배도 훨씬 넘는 액수를 제시했으니 기절할 만도 하다.(그것도
할인가로 쳐서!!!)

나는 P의 전시 도록을 무료로 만들어줬다. 사실은 그것만 해도 수백만원은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내가 좋아서 도와준 일에 생색을내자는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이 상식적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많은
이들이 그래픽 디자인이라고하면 왠지모를 환상과 신비감을 품지만, 막상 그게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돼야 할 경우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소원을 빌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공짜 선물이기를
기대한다. 명함 디자인을 부탁하고 (아무렇게나 해줘),무료 글꼴을 프린트하고
(폰트 다운받는 사이트 좀 알려줘), 공짜 웹사이트 템플렛을 다운로드한다.
(쓸만한 태그 몇개보내줄래?) 아무도 화가에게 그림 하나 그려달라고 함부로
부탁하지 않는다. 아무도 조각가에게 동상 하나 공짜로 만들어 달라고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면서 보수를 받지 못해 억울해 하는
디자이너는 거의 없다. 오히려 많은 경우 디자이너는남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위해서 무료로 봉사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봉사라고 해서
공공기관이나 양로원을 찾아가야봉사가 아니다. 아무런 댓가 없이 개인적 부탁을
받고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풍요롭게 해주는 일도 엄청난 봉사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주변의 작은 디자인들을 나서서 해결해주곤 한다. 하지만
미안해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놓고 당연하다는 듯이 공짜를 바라며손벌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기분이 적잖이 언짢아짐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창의적인
노력은 어떤 댓가를 지불하기엔 너무도미미해서 쉽게 얻어가고 빌려써도
좋다고 인식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에게 디자인은 결국 어찌되건 상관없는
포장지일 뿐인 것인가?디자이너들이 적절한 보수에 대해 말하면서 진심으로
얻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돈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일것이다.

나는 P에게 카탈로그에 사용된 두 글꼴, '미시즈 이브즈'와 '가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앞으로 당신의 작품집이나 전시회가있을 때마다 항상 이 두 글꼴을
쓰라고 권했다. P는 거의 '떡실신'할 정도로 내 제안을 맘에 들어했다. 그런데
어느날 P가오바마 캠페인이 가담을 공식 글꼴로 쓰다보니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어떤 정치적인 냄새가 벨수 있지 않겠냐는 걱정을 털어놨다.그래서 나는 최근
에미그레가 출시한 '미시즈 이브즈 산즈'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P는 또 한번
떡실신하며 글꼴 파일을 복사해달라고 졸랐다. 나는 나온지 얼마 안되는 글꼴이라
아직 구하지 못했고, 만약 이것을 쓰고 싶다면 에미그레에서 '구입'해야 한다고
친절히 알려줬다.

P는 그 후로 글꼴에 대해 일절 말을 꺼내지 않는다.


디자인 읽기

by 어민 | 2009/11/08 00:54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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